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76년 탕산 대지진 (문단 편집) == 상세 == [[중국 정부]]가 발표한 공식적인 사상자 수는 사망자 242,400명, 중상자 164,000명, 불구 3,800명으로 [[20세기]] 최악의 지진 피해 중 하나였지만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주재 외신 기자는 거의 없었고 중국 언론도 중국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읊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적극 취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 사진을 제외한 당시의 사고 지역 사진을 찾는 건 상당히 힘들다. 남아 있는 사진은 피해 지역의 일부만 찍혀있다. [[대만]]에서는 사망자를 60~100여만명까지 늘려 잡기도 한다. 초기에 [[허베이성]] 혁명위원회에서는 사망자 655,000명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이렇게 피해가 클 수밖에 없던 이유가 탕산이란 도시가 판과 판 사이의 [[탄루단층]] 위에 놓인[* 고교 교육과정에서만 보면 그냥 유라시아 판에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건 교육 편의상 핵심적인 판들만 배워서 그런 거고 더 전문적으로 보면 [[아무르 판]]과 [[유라시아 판]]의 경계에 걸쳐 있다. 참고로 [[북한]]의 [[황해도]]도 그 두 판 사이에 걸쳐 있으며 한반도 전체를 보면 서해안 쪽을 남북으로 해당 경계가 가르고 있다.] 도시였고 지반에 생긴 공동으로 지표면이 내려앉는 형태의 직하형 지진이었기 때문에 '''도시가 단 한순간에 가라앉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인구 100만을 넘는 상당한 규모의 도시였으므로 지진 피해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일대가 충적평야여서 [[액상화]][* [[지하수]]가 가까운 모래토양이 진동에 의해 액체같은 상태가 되는 현상.] 현상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는데 당시 탕산시의 건물들은 대부분 '''아래 기반암에 뿌리를 박지 않고 지어졌다.''' 당연히 건물이 버틸 수 없었다. 실제 지진의 지속 시간은 대략 20~30초 내외로 그렇게 긴 편이 아니었다고 하며 여진은 실제 지진에 비하면 별로 없는 편이었다.[* 다만 첫 지진이 발생한 지 16시간 쯤 뒤에 거의 비슷한 규모의 여진이 한 번 더 발생했다고 한다.] 지반에 단층이 발생해 지반 속에 공동이 발생하고 그 사이로 광범위한 지반이 가라앉은 형태의 지진이었기 때문이다. [[2008년 쓰촨성 대지진]]과는 다른 형태의 피해가 발생했는데 탕산은 서로는 [[베이징시]], 남으로는 [[톈진시]]라는 [[대도시]]를 끼고 있었으며 [[중국]]에서 당시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었던 데다 공장들이 많이 세워진 공업도시였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 사이쯤에 존재하는 [[부천시]] 같은 위치. 그렇지만 여진이 크지 않았고 지진의 범위가 좁은 직하형 지진이다 보니 불행 중 다행으로 탕산 이외의 지역은 생각 외로 지진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탕산 이외의 사상자는 70만명 중 8만명 내외로 집계된 것.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베이징과 톈진의 최대 진도는 규모에 비해 매우 작은 VI(6)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모든 사람이 느끼긴 하지만 기껏해야 [[유리창]] 깨지고 마는 수준이니 그야말로 기적이다. 중국 정부가 대거 인력을 투입했는데도 완전한 복구에만 몇 년 걸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광범위한 지역이 수미터 아래로 푹 내려앉은 상황인 데다 주변에 그나마 내려앉지 않은 지역도 피해가 심각했고 그걸 메우고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으며 피해가 너무 막심하다 보니 그냥 메울 수도 없었기 때문. 실종자 수색에만 총 복구 기간 10년 중 6년 가량을 투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매장 작업이 신속하게 이루어져서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다만 신원 확인이 확실히 진행된 채로 매장이 이루어진 경우는 적었기 때문에 종종 [[이산가족]]이 발생한 사례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탕산이 광공업도시인 것도 피해 확대에 한 몫 했다. 당시 [[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갱도]]에 매몰된 사람만 수천 명이 넘어서 매몰자들을 찾아내는 데만 해도 상당한 기간이 걸렸다. 이후 광공업도시였던 탕산은 구호 공산품 생산 도시로 경제구조 개편이 이루어졌다.[* 지금도 광산업이나 여기서의 생산물을 소재로 한 제철업 등의 산업이 계속 돌아가고는 있다.] 탕산의 복구를 위해 이주 권고를 통한 이주로 탕산의 인구를 채우기도 했다고 한다. [[1986년]]에 30m 높이의 항진기념비와 항진기념관이 세워졌으며 항진기념관에 탕산 대지진에 대한 자료와 복구 과정을 그린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다만 복구 과정을 집중적으로 홍보하다 보니 생각보다 볼만한 전시물이 적다는 평이 있다.] 그렇지만 중국도 경제개발과 세수 확충을 이유로 부동산 개발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강했고 기념비 근처 지역에 고도제한이 설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탕산항진기념비 옆에 고층건물들이 우후죽순 세워져 있어서 추모의 의의가 희석된다는 의견도 많다. 당시 중국 정부는 [[냉전]] 하에서 [[미국]], [[소련]] 양국과 모두 거리를 두는[* 다만 당시 [[미국]]과는 사이가 좀 좋아졌다.] [[고립주의]] 노선을 걷고 있었던 데다 [[언론통제]]로 그 참상이 외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보니 외국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당시 중국은 세계 최빈국이었기 때문에 [[중장비]]도 거의 없어서 구조인력이 든 도구는 [[삽]]과 [[곡괭이]]가 다였다. 이후 중국 정부에서 교훈을 얻어서 [[2008년 쓰촨성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외국의 원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건 34주년이었던 [[2010년]] [[7월 28일]] 해당 사건을 극화한 [[펑 샤오강]] 감독의 재난 영화 〈탕산대지진〉이 개봉되었으며 한국에서는 [[2010년]] [[11월 4일]] [[CJ엔터테인먼트]]가 〈'''[[대지진(2010)|대지진]]'''〉으로 이름을 바꿔 수입했고 필라멘트픽쳐스를 통해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당시 [[중국]]에서 최대의 흥행을 기록했다. 일부 관객은 [[중국 인민해방군]]을 너무 띄워줬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탕산 대지진으로 헤어진 가족이 [[2008년 쓰촨성 대지진]]을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을 눈물나게 그려냈기 때문에 탕산 대지진 유족들도 탕산 대지진 당시를 추억하며 눈물을 흘리며 봤다는 후문이 있다. 지진 당시 목숨을 구한 이들의 수기가 담겨진 책자가 오래전에 번역되어 나온 바 있는데 어느 생존자가 발을 씻은 물을 버리려고 하다가 지진이 나서 집이 무너지는 통에 보름 이상 잔해 속에 갇혔는데 '''그 버리려는 발 씻은 물을 마셔 가면서''' 견뎠다고 한다. 당시 대한민국에서도 지진이 느껴졌다고 하지만 지속 시간이 길지 않았고 직하형이라 범위가 좁았던 데다 새벽 시간이었던지라 직접적으로 지진을 느낀 사람들은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 일어나는 대지진이 대한민국에도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은 만큼 그로부터 2년 뒤인 [[1978년]] [[9월 16일]]에는 규모 5.2의 [[1978년 속리산 지진|속리산 지진]]이, [[10월 7일]]에는 규모 5.0의 [[1978년 홍성 지진|홍성 지진]]이 일어났다. 흥미롭게도 약 40여년 뒤에 일어난 [[2017년 포항 지진]]과 직하형 지진으로 인한 큰 피해, 액상화 현상 발생 등 많은 부분이 흡사해 비교되기도 했다. 이 대지진을 겪은 다음 [[효고현 남부 지진]]을 겪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